오늘은 제주 4.3사건이 발발한 날입니다. 마침 레터 발행일과 겹친 이날, 짧게나마 이 일을 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저는 학교 수업이나 활동으로 4.3사건의 잔혹함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확 마음에 와닿았던 순간은 3년 전입니다. 외할머니께서 희생자 유족임이 밝혀져 가족이 함께 유족증을 발급받으러 갔었거든요. 그제야 60만이 넘는 도민 중, 자신이 희생자 유족인지도 모른 채 또는 숨긴 채 사는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무자비하게 자행된 학살로 여전히 찾지 못한 유해가 많습니다. 부디 유가족들이 조금이라도 편히 고인의 명복을 빌어줄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하길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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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5주차 독서달력입니다. 일과 돌봄의 양립을 위한 여성들의 고군분투 『돌봄과 작업』(2022, 돌고래), 독일 오두막에서 빚어낸 읽고 쓰기의 순간 『작별들 순간들』(2023, 문학동네), 유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세 형제의 성장 서사 『세 형제의 숲』(2022, 다산책방), 생존자의 지극한 사랑 기록 『작별하지 않는다』(2021, 문학동네), 빛의 화가 '모네'의 삶을 되짚는 여행 『클래식 클라우드 14: 모네』(2019, 아르테)까지 총 5권을 완독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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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스물아홉까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이 앞으로의 취향을 결정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마지노선의 나이가 된 저는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요. 친구들과 대화하면 '이 나이에 무슨', '이 나이 되도록'이란 말을 버릇처럼 붙이며 한탄하기 바쁘죠. 미래를 낙관하던 십 대에 바라본 스물아홉은 대단한 나이였어요. 회사에 다니며 직급은 대리일 테고, 경제적으로 안정돼서 고민의 절반은 해결돼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죠.
상상 속 스물아홉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우선 한 직장에 근속하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더군요. 소속 없이 고군분투하는 건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지루는 개뿔, 하루하루가 스펙터클합니다. 한 직장에 오래 다니는 친구는 부럽고, 결혼해 아이를 키우는 친구는 대단해 보입니다. 뭐랄까, 저보다 훨씬 어른이구나 싶달까요. 나 하나도 돌보기 힘든데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책임지는 걸 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이젠 특정 나이에 무엇을 이루는 것보다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갖고 사는 게 더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도 매 순간 남 탓을 하거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사람을 보면 별로 어른으로 존중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럴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제 나이에 맞는 성숙한 태도를 지녔느냐, 그것이 나이의 가치인 것 같습니다.
나이 얘기를 하니 영화 <해피해피 브레드>의 노부부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 카페 마니에 찾아온 노부부는 오랫동안 목욕탕을 운영했지요. 시대가 변하면서 목욕탕을 찾는 사람들이 뜸해지고, 할머니가 병을 앓게 되면서 할아버지는 죽음을 결심합니다. 이 계획이 수포가 된 건, 늘 밥만 먹던 할머니가 마니에서 만든 빵을 먹고 '내일도 이 빵을 먹고 싶다'고 말해서예요. 여기서 할아버지는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계속 변한다'는 걸 깨닫죠.
따라서 스물아홉까지의 경험이 앞으로의 취향을 결정한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사람은 변하고 또 변합니다. 그에 맞춰 세상도 매일 변하고요. 그저 제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만이 가진 생체시계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거죠. 간혹 기회가 오지 않아서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냥 생각합니다. 나를 책임지고 살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요. 물론 일은 계속하면 좋겠네요. 적당한 일은 삶의 잔 고민을 털어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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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너무 선명해 잊지 못합니다. 소설 속 인선의 어머니 기억이 그렇지요. 시체 더미에서 언니와 함께 부모의 얼굴을 찾아 헤매던 어린 날의 충격은 차갑게 식은 얼굴에 내린 눈은 녹지 않는다는 이미지로 생생히 각인되었죠. 이처럼 제주의 4월에는 붉은 고통이 배어 있습니다.
그가 만약 십대였다면 출생 연도가 엄마와 얼추 비슷할 것 같았어. 두 사람의 그후에 대해 다루면 되겠다는 계획이 섰어. 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에 대해서. (p. 213)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가 '경하'가 오랜 친구 '인선'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고, 제주에 내려가 4.3사건과 얽힌 인선의 가족사를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작별」을 잇는 ‘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되었지만,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 되었다고 해요. 이 일이 현재진행형이란 걸 떠올리면 지면이 늘어나도 당연하단 생각밖에 들지 않죠.
경하는 학살과 고문을 다룬 소설을 집필하며 악몽을 꾸기 시작합니다. 꿈의 내용은 항상 같습니다. 어두운 바닷가에 자리한 무덤이 밀물로 잠길 위기에 처하고, 경하가 매번 뼈들을 옮기기 위해 무덤으로 뛰어가다 현실로 돌아오는 지옥을 반복하죠. 70년 전, 마을 사람들이 모래사장에서 과녁 옷을 입은 채 총살되고 그들의 뼈와 살을 바다가 삼켜 버린 그날처럼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p.226)
악몽과 지독히 싸우던 경하에게 '지금 와줄 수 있어?'라는 인선의 문자가 도착합니다. 연락받고 달려간 병원에서 인선은 잘린 두 손가락을 봉합한 채, 신경이 죽지 않도록 3분마다 바늘로 환부를 찌르고 있었죠. 둘은 악몽과 절단이란 개인적인 고통으로 잔혹한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 뻔뻔스럽게 - 바라고 있었던 것(p. 23)이냐며,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p. 57)은 얼마나 아팠겠냐며.
소설에는 역사의 고통과 기억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내포돼 있습니다. 제주집으로 돌아온 인선이 경하에게 보여준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록은 분투였죠. 어머니는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오빠의 공백을 메꾸며 이날까지 살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인선에게, 인선이 경하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는 그리움이 가득했어요. 직접 목격한 죽음과 살아남은 자의 몸부림, 한참이 지나서야 되찾았던 삶의 흔적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움을 사랑으로 끌어안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저는 인선의 어머니를 찾아와 '그날 모래밭에서 아이들을 봤는지' 묻던 남성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본 목격자를 수소문하다 그녀를 찾아온 남성이나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p. 230) 같았다는 어머니 모두 억울한 피해자였습니다.
잊으려 해도 절대 잊히지 않던 기억들, 그건 '잊어야 하는' 게 아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유골도 찾지 못한 가족들이 많습니다. 4월마다 밀려오는 핏물 위에서 우린 태어났고, 때론 그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평화의 섬'이란 수식어는 '평화로워서' 붙여진 게 아닙니다. 이 땅에 평화가 반드시 도래해야 하므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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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tvN <알쓸범잡>에서 '제주 4.3사건'을 다뤘습니다.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을 시작으로 무려 7년간 다수의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된 사건을 말합니다.
지금도 4.3사건이 어떤 경위로 발생했는지,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생겼는지 모르는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영상으로나마 참혹한 진실을 알아보는 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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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정 『에이징 솔로』 (2023, 동아시아)
20·30대의 싱글라이프, 이혼·사별로 혼자가 된 노년의 삶은 종종 논의됐지만, 그 사이 '비혼 중년'의 이야기는 공백입니다. 저자는 40·50대 ‘에이징 솔로'를 집중 조명해, 홀로 나이 들어갈 모든 이들에게 지침서를 제공합니다. 저 역시 언젠가 도래할 중년의 모습이 선뜻 그려지진 않는데요. 이 책에선 자유롭고 안전하게 나이들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서윤빈 외 6인 『림: 쿠쉬룩』 (2023, 열림원)
열림원에서 '림(LIM)'이란 젊은 작가 단편집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장르나 형식, 제도적 등단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신작들을 한곳에 모아 소개한다고 하는데요. 그 첫 번째인 『쿠쉬룩』은 서윤빈, 서혜듬, 설재인, 육선민, 이혜오, 천선란, 최의택 작가와 정청림 문학평론가가 함께했습니다. <문학 웹진 LIM>에선 매주 다채로운 신작들을 만날 수 있다니 기대되네요.
📗 안드레 애치먼 『호모 이레알리스』 (2023, 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집필한 안드레 애치먼의 시간 그리고 경험과 예술에 대한 고찰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비현실적 서법(irrealis mood)'을 기반으로 쓰였는데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나 바람을 토대로 수많은 예술가의 발자국을 탐구합니다. 듣기만 해도 낯선 작가의 상상력이 궁금해지네요.
📗 이레네 바예호 『갈대 속의 영원』 (2023, 반비)
현재에 이르기까지 책을 고안하고 지켜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역사, 에세이, 우화를 넘나드는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이야기를 이끌죠. 고대 세계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신화적 인물과 사람들이 등장하며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를 만듭니다. 어느 영웅의 일대기보다 다채롭고 짜릿한, 이들의 비밀스런 노력을 함께 파헤쳐 보는 건 어떨까요.
📗 현호정 『고고의 구멍』 (2023, 허블)
'소녀와 신화'라는 중심 키워드를 '성장'으로 연결하는 현호정 작가의 신작입니다. 홀로둥이로 태어난 고고는 마을에서 추방당하고 가슴에 난 구멍을 알아차립니다. 내 구멍을 메우기 위한 여정은 행성의 구멍을 인식하며 점차 세계로 확장되지요. 상처와 상실이란 구멍에 고고는 무엇을 채워 넣었을까요. 고고처럼 우리가 가진 구멍도 메꿀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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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설명은 출판사 서평을 참고해 작성했어요. * 빨간색 글씨를 클릭하면 자세한 도서 정보를 볼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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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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