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호. 상처와 함께 잘살아 보려고 해

2023. 3. 20.

시기를 놓치면 몇 번 입지 못하는 봄옷처럼 황망한 일들에 시름 했습니다. 며칠을 손 놓고 지내니 망가지는 건 저뿐이더군요. 상처를 준 자는 상처받은 이의 흉터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상처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애쓴 이주였습니다.

마음 정리에 특효약은 정리입니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겨울옷을 세탁해 널고, 겨우내 정리한 책들도 처분하려 나눔 공지를 올렸어요. 다시, 일어서보려 합니다.

👉2023년 1차 도서나눔 참여하기

📅 𝙱𝚘𝚘𝚔 𝙲𝚊𝚕𝚎𝚗𝚍𝚊𝚛

이달의 독서달력

2023년 3월 3주차 독서달력입니다. 나쁜 기억에 압도당하지 않고 맞서는 법 『왜 상처받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까』(2022, 풀빛), 나를 지우고 살린 글쓰기의 희로애락 『쓰는 직업』(2022, 마음산책), 빨리 감기, 건너뛰기, 몰아보기로 대표되는 콘텐츠 소비 트렌드 분석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2022, 현대지성), 포기하지 않으려는 다짐들의 기록 『끈기의 말들』(2023, 유유), 폭력의 잔상으로 신음하는 모든 '이제야'에게 부치는 편지 『이제야 언니에게』(2019, 창비)까지 총 5권을 완독했습니다.

* 빨간색 글씨를 클릭하면 자세한 도서 정보를 볼 수 있어요.

📝 𝚂𝚝𝚛𝚊𝚢 𝚝𝚑𝚘𝚞𝚐𝚑𝚝𝚜

쉼표와 따옴표

한라수목원에 핀 이른 봄꽃

"1시간만 걷자. 생각이 많을 땐 걸으면 괜찮아져."

미세먼지로 온 세상이 뿌옇고,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날 S는 말했습니다.

전날 밤 오래 곪아서 터져버린 모종의 일로 저는 다시 폐허가 된 일상을 살고 있었어요. 나는 왜 살아야 할까. 살면서 뭘 그리 잘못했다고 삶은 매번 안 좋은 것들로만 골라서 선물할까. 억울하고 분해서 날 것의 글을 휘갈긴 참이었죠. 그때 S에게 문자가 왔어요. 한라수목원에 가지 않겠냐고.

정류장에서 수목원 입구까지 10분, 입구에서 잔디광장까지 10분, 잔디광장에서 체력 단련장까지 10분. 힘들어서 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고작 10분이 지나있었어요. 분명 오전까진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로 삶을 멈추고 싶었는데, 여기선 고작 덥고 숨이 차서 걸음을 멈추고 싶었죠.

겨우겨우 1시간을 채우자 아이스 바닐라라테가 당겼어요. 우린 20분을 더 걸어 카페로 갔죠. 달달한 커피가 들어가니 살 것만 같았어요. 고작 시원만 커피 한 잔만으로도 살 것 같았어요. 숨을 돌린 후, 또렷해진 정신으로 속엣말을 털어놓았습니다. S는 그저 묻기만 했어요.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벗어날 방법은 없는지. 그리고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지점을 똑같이 납득하지 못했죠.

우린 저녁을 먹고 집까지 또 함께 걸었습니다. 계속 걸어 다닌 탓에 옷은 비릿한 땀으로 축축했어요. S는 종일 곁에 머물며 독소 가득한 에너지를 쫙 빼주었어요. 그리고 말했죠. "나는 친구니까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문제는 그대로인데 기분은 한결 나아졌고, 그날 밤은 생각할 힘도 없이 잠에 들었어요.

그날 이후, 매일 나가서 걸었습니다. 하루는 무거운 가방을 메서 목과 어깨가 저릿했고, 또 하루는 만 육천 보를 걸어서 다리가 후들거렸죠. 살고 싶다는 의지는 모르겠으나 걸으면 기분이 전환돼서 좋았습니다. 목적지까지 걷고 그곳에서 나로 가득 찬 시간을 보내면 그날 밤만큼은 무탈하게 지나갔어요.

아이유는 우울함이 찾아오면 "나는 이 기분을 5분 만에 바꿀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바로 행동에 옮긴다고 합니다. 저의 우울은 5분 만에 바꿀 수 없고, 때론 KO패까지 당하지만 그래도 스위치의 주인은 나란 걸 이젠 압니다.

💬 𝙱𝚘𝚘𝚔 𝚌𝚘𝚖𝚖𝚎𝚗𝚝

이주의 독서리뷰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

끔찍한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p. 8)

2008년 7월 14일 월요일. 위 문장이 적힌 제야의 일기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방에서 은둔하던 제야가 용기 내 적은 문장이죠. 제야는 자꾸 커지는 그날의 기억을 얄팍하고 단순한 언어에 가두려 하지만 다 담아낼 수 없어 '끔찍한' 위에 줄을 그어요. 여기까지만 읽어도 피해자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죠.

제야는 일기를 통해 사건 전후의 일상과 심경을 전합니다. 안쓰러웠던 건, 자신과 제니에게 해코지할까 봐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산부인과와 경찰서를 드나드는 제야였어요. 그런 제야를 '피해자답지 않다'며 의심하는 경찰들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더군요.

잘못은 당숙에게 있다고 믿던 제야지만, 주변 어른들의 손가락질로 점차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요. 영혼이 부서진 제야는 버려지듯 엄마의 오랜 친구 '강릉 이모'에게 보내지죠. 세상의 풍파를 막아주고 아픔을 어루만져준 유일한 어른, 강릉이모 덕분에 제야는 살아낼 힘을 얻고 대학에 진학합니다.

이모의 울타리를 벗어난 제야는 다시 트라우마로 고통받습니다. 함께 살던 제니가 잠시 고향으로 내려간 뒤 홀로 남은 제야는 자살 시도를 해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승호가 차가워진 제야의 손발을 주무르던 장면에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났어요.

제야가 당하는 모든 상황을 지켜본 제니, 당시 교통사고로 제야에게 가지 못한 승호도 또 다른 피해자예요. 위 장면에선 이번만큼은 기필코 누나를 구해야 한다는 승호의 간절함이 느껴져서 더 슬펐어요. 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이 없었다는 점에 화도 나면서요.

『이제야 언니에게』는 2008년 7월 14일의 제야가 어른이 된 제야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폭력에 신음하는 모든 '이제야'에게 전하는 위로입니다. 제야는 대학 졸업 후,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홀로서기를 택해요.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아픔을 수없이 털어놓죠. 고통을 마주하고 씻어내는 반복을 거치며 차가워진 머리로 제야는 그날의 일을 재정의합니다. 그리고 "나를 견디지 않고, 나와 잘살아 보고 싶다"고 다짐해요.

나는 좀 더 멀리까지 가고 싶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p. 228)

복수든, 망각이든, 용서든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이면 좋겠어요. 그게 무엇이든 홀로 감당했을 고통의 진폭을 우리가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최진영 작가님은 소설 속의 악함이나 부조리한 면도 자기 안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2차 가해의 말들도 '내가 내면화한 말들이 아닌가' 쓰면서 많이 반성하셨다고 해요.

내 생각은 과연 내 생각일까요? 누군가의 질문을 내 것이라 착각한 건 아닐까요? 인터뷰를 보며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최진영 작가 인터뷰 보기

* 출처: 창비TV

📚 𝙻𝚒𝚋𝚛𝚊𝚛𝚢 𝙲𝚊𝚛𝚍

대출 희망합니다!

* 사진 출처: 교보문고

3월 3주차에 신청한 희망도서는 『사랑의 꿈』, 『두고 온 여름』, 『마음에 이는 물결』, 『다른 방식으로 듣기』,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입니다.

📗 손보미 『사랑의 꿈』 (2023, 문학동네)

작가는 '일인칭 십대 여자아이'의 시점으로 아름답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성장을 그려냅니다. 바로 그때 느꼈던 낭패감과 비정함은 우리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것들을 짜릿하고 통렬하게 깨뜨리죠. 위험천만한 사건들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그들만의 감각으로 내가 있을 자리를 결정합니다. 변덕스러워서 가장 독창적이고 집요했던 '그 시절'. 우린 어땠을까요?

📗 성해나 『두고 온 여름』 (2023, 창비)

부모의 재혼으로 잠시 형제로 지냈지만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영영 남이 되어버린 기하와 재하. 두 사람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상처를 주고받은 과거를 곰곰이 되짚으며 자책과 후회, 미련과 원망, 살핌과 헤아림을 담담히 풀어놓아요. 온전히 기대지 못하고 외로지 지나온 시간을 어루만지면서요.

📗 어슐러 K. 르 권 『마음에 이는 물결』 (2023, 현대문학)

SF·판타지 문학의 세계적인 거장 어슐러 K. 르 귄의 에세이집입니다. 1988년부터 2003년까지 문예지 등에 발표한 에세이, 문학 작품집의 해설과 서문 및 워크숍 강연 원고 등을 새롭게 손보아 엮었어요. 수십 년간 쌓아온 글쓰기와 읽기 예술에 대한 곡진한 성찰이 담긴 거장의 생각들이 궁금하네요.

📗 데이먼 크루코프스키 『다른 방식으로 듣기』 (2023, 마티)

록밴드 갤럭시 500의 멤버였던 저자는 자신의 음악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비평가, 역사학자, 레코드숍 운영자, 이과병원 귀 전문가 등 다양한 전문가를 초대해 지금의 듣는 방식을 탐구합니다. 책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신호와 소음을 잊지 말자고 말하죠. 선명한 소리 뒤, 삭제된 풍경의 소리를요.

📗 목정원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2023, 아침달)

2016년부터 작가가 여러 나라를 오가며 필름카메라로 남긴 백여 장의 사진과 산문을 담았습니다. 사진의 흐름에 따라 글을 배치해 둘이 하나의 텍스트로 느껴지지요. 작가는 우리 눈앞의 어떤 장면들은 미래에 없을 사랑으로 흐르기에, 그것을 남기려 하는 일은 영원한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의지와 같다고 합니다. 그의 시선 끝, 빛나는 마음을 함께 느껴보고 싶네요.

* 도서 설명은 출판사 서평을 참고해 작성했어요.
* 빨간색 글씨를 클릭하면 자세한 도서 정보를 볼 수 있어요.